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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저 취업했어요” 할머니 선물이라면 역시 홍삼?카테고리 없음 2020. 8. 4. 02:44
할머니께 선물을 드려야 할 때 많이들 생각하는 것은 음식류이지 싶다. 홍삼, 영양제와 같은 건강식품이나 카스텔라, 모나카 이런 달달한 디저트류 같은 그런 먹을 것. 그게 아니라면 현금봉투 뭐 그런 거지 않을까.
취업 기념으로 부모님, 언니, 친구 등 주변 사람들의 선물을 하나씩 챙기면서 유년시절 나의 보호자이자 말동무이자 반드시 지키고 싶었던 존재 할머니께는 어떤 선물을 드릴까 생각했다.
할머니와 나는 태어나서부터 12살이 되던 겨울까지 함께 살았다. 할머니가 모를 심으면, 나도 같이 논두렁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고, 할머니가 고구마를 캐면 나도 옆에 앉아 호미질을 하고, 할머니가 가마솥에 팥죽을 쑤면 까맣게 그을린 부지깽이로 그림을 그렸다.
부모님 대신 나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여하셨던 할머니. 할아버지 대신 당신의 고됨을 들어주었던 나. 훗날 커서 알게 된 사실은, 우리는 서로에게 귀인으로 작용하는 사주팔자를 지녔다고 한다.
할머니덕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자연을 사랑하고, 새로운 경험과 시도에 두려움을 갖지 않고, 이데올로기에 굴복하지 않는 그런 나의 모습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결혼 전까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던 당신이 농사를 하고, 땔감을 주으러 가고, 여덟이나 있는 할아버지의 동생들을 돌본다는 것은 참 많이 고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매일 혼자서 해오던 그 일에 내가 함께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당신을 고단하게 하는 모든 것에 강아지처럼 짖어주는 내가 있었다는 것이 당신께는 귀중했지 않았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사주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할머니에게도 나의 존재가 귀하게 작용했기를 바라본다.
이처럼 내게서 특별한 할머니께 다른 손주들도 충분히 줄 수 있는 홍삼, 카스텔라, 현금 이런 것을 드릴 순 없었다. 당신이 꼭 필요로 했던 무엇인가를 선물로 주고 싶었다. 이것은 당신과 함께한 추억이 많은 손주로서의 도리이기도 할 테니까.
생각해봤다. 할머니의 시선에서 할머니의 태도들을.
젊어서부터 풍성하고 튼튼한 모발에 아주 진한 모색은 할머니에게서 자랑이었던 것 같다. 그만큼 머리가 세기 시작하고, 숱이 적어지는 그 과정을 받아들이기를 꽤 어려웠는지 언제부터인가 볕을 피하거나 추위에 맞서야 하지 않아도 될 때에도 모자를 챙겨 쓰기 시작하셨다. 밭에 나갈 때, 장을 보러 갈 때, 노인 학교에 갈 때 가리지 않고 모자를 찾으셨다. 할머니에게는 모자가 필요했다.
할머니 선물이라고 해서 할머니들이 애용하는 브랜드 모자를 주고 싶지 않았다. 되려 멋 쫌 부린다는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브랜드 모자를 주고 싶었다. 친구들이, 자식들이 아닌 손주에게서 받은 선물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도록 말이다.
할머니는 형태가 잡힌 모자보다는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한, 머리에 착 감기는 모자를 좋아셨기에 니트류 모자를 찾아보았다. 붉은색을 좋아하시니까 붉은 빛깔로 말이다.
김나영, 공효진, 한혜연이 사랑한다는 브랜드 로브로브 서울에서 와인색 니트 모자를 찾았다. 풍성한 털로 짜인 모자기에 어쩌면 할머니는 이 모자를 쓰고서 자랑이던 풍성한 머리를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실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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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모자가 아주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다. 어느 정도였냐하면 처음에 선물을 준비했다는 나의 말에 ‘그런 거 다 필요 없으니 너 맛있는 거나 사 먹어라’ 말씀하시다 붉은 니트 모자를 보자마자 함박 웃음을 지으며 냉큼 쓰씨는 것이다.
“우리 류원이는 나가 마촘 필요한 것을 우찌 이리 잘 아노. 아니 나가 늘 쓰던 보라색 모자가 오래돼가지고 내삐고 시로 살까, 그런 상각을 하고 있었던 참에. 나가 진짜로 안 받을려고 했는데 쏙 마음에 들어서 받아야겠다.”
할머니, 할머니의 특별한 손주가 될 수 있어 아주 많이 다행이라 생각했어. 언제나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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